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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5.08 경주를 다녀오다 (두번째날 - 두번째 이야기)


이 날은 일요일. 주말 아침임에도, 관광객들은 많습니다. 덕분에 사진 찍어주길 부탁할 사람들은 꽤 있었어요. 전날 사진을 찍어주며 낯을 익힌 사람들을 또 다시 만나기도 했지요.
지나가는 이들에게 여러 사진을 부탁했는데, 남은 사진은 몇 되질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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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의 세계에 들어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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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탑 앞에서 찰칵~


일요일 아침이라선지(?)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전당 안에는 목탁소리에 맞춘 독경소리가 그득합니다. 이전에 직접 들어본 적이 드물었기 때문일까요.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차분하게 느껴집니다. 대웅전 앞 마당, 두 탑 사이 관광객들의 소란스런 재잘거림과는 또다른 세상이 전당 안에 있는 것만 같았어요.

시끄럽기까지 한 관광객의 소란함에 눈살이 찌뿌려졌습니다. 아마 부처님이 노하실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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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경하시는 스님의 모습을 찍었습니다


독경하시는 스님의 모습과 불상을 찍으려하자, 관리자가 다가와서 황급히 가로막습니다. 불상이 국보급 문화재라서인가요. 제지하기 전에 불상을 빨리 찍어두긴 했지만, 독경하시는 스님까지 나오지는 못했습니다. (사진은 다른 전당에서 독경하시는 스님 모습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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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의 세계 이곳저곳을 둘러봅니다. 파아란 하늘과 아침의 따갑지 않은 밝은 햇살이 마음을 들뜨게 하네요.


불국사를 나와서 가볼 곳은 석굴암입니다. 토함산 아래 불국사가 자리를 잡고 있다면, 그 정상쯤에 석굴암이 있지요. 불국사에서 차를 타면 가파른 길을 타고 20분쯤 가면 석굴암에 도착하지만, 이게 왠일~?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쯤 온다는 것이었어요. 방금 떠난 차를 원망하며 한 시간을 기다리는 대신, 산길을 따라 석굴암으로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돌맹이로 포장된 산길 초입은 어느새 흙길로 변해있었습니다. 군 제대 이후로 산길은 거의 올라본적이 없기에 더 힘이 들었어요. 평소에 운동 좀 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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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으로 오르는 길


좀 힘이 들었지만, 걷다보니 오히려 걸어 올라가길 잘했단 생각이 듭니다. 차를 타고 올랐다면 산길의 정취와 호젓한 기분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테니까요. 석굴암을 만든 천여년 전에도 사람들은 이 길을 오갔을지도 모르지요..

40여분만에 석굴암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언덕이 끝나자 훤해진 시야와 더불어, 산길의 호젓함과는 거리가 먼 또다른 모습이 눈에 보입니다. 주차장의 수많은 차,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은 이곳이 산 정상임을 실감하게 못하게 합니다.

석굴암의 입장료는 4천원. 안압지, 경주 박물관이 천원인 것에 비하면 비싼 편입니다. 그러고보니 불국사 입장료도 4천원이었던 것 같습니다. 불교계에서 운영하는 곳이라서인가요. 아니면 경주에서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라서 수입증대에 짭짤한 효과가 있어서인가요. 유적지 관리를 위한 입장료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입장료 4천원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전 유적지 입장료 징수를 두고 논란이 일었던 게 떠오르더군요.

10여분쯤 숲길을 걸어가니 석굴암 앞에 도착했습니다. 석굴암의 본래 이름은 '석불사', 석굴암 본존불이 석불사의 주존불인 셈이죠. 불국사와 같은 시기에 건립되었지만, 오랜 시간을 거치며(특히 일제의 식민지 시기에) 크게 왜곡되어 버린 곳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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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곡의 흔적. 일제시대 및 박정권 시기, 보수 과정에서 생긴 부속물들


석굴암 근처에 쌓여진 석굴암 부속물들입니다. 이것들이 과거에는 석굴암을 지탱하고 있었겠지만, 일제시기에 해체 보수를 하면서 아무 의미 없는 '돌'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시멘트를 뒤집어 쓴 석굴암은 박 정권 시절에 다시 보수를 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지만, 석굴암에 또다시 콘크리트로 이중 돔을 씌움으로서 석굴암을 회생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버렸어요. 일제나 박정권이나, 보수를 한다면서 '수술'을 한 것이 오히려 재생불능 상태로 만든 것이지요.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2권 p.137~237 참조.)

천년동안을 이어오면서 자연적인 이슬한번 맺히지 않았던 석굴암이었습니다. 그 원인을 두고 여러 이견들이 존재하고요. 그 중 하나는, 자연적인 공기 순환을 통해 석굴암이 결빙되지 않고 유지되어왔다는 시각입니다.

하지만, 시멘트와 콘크리트를 발라버리는 대수술 이후 석굴암 이곳저곳에는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어요. 이는 불상 보존에 심각한 결함이 되었고요. 그래서 지금도 석굴암 입구는 유리로 막아놓고 습도조절기를 가동하는 웃지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유물유적의 복원 보수에 조심스러워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보수가 이뤄진 것이 일제시대 및 박정권 시기였음을 볼 때, 이러한 작업이 권력의 정치적 의도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겠지요.
(시멘트로 석굴암을 덮어버린 건 일제였고, 그로 인한 누수를 막기위해 콘크리트로 이중 돔을 씌운 것은 박정권이었습니다. 하지만 졸속으로 복원이 이루어지다보니 석굴암의 결빙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석굴암 뿐만이 아닙니다. 일제시기에 익산 미륵사지 석탑 일부분도 시멘트가 발라져 보수되었어요. 박정권 시기에는 천마총 및 무령왕릉 발굴, 불국사 복원 등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산업화 시대는 시멘트, 철강 등을 통한 철도 및 고속도로 건설, 공장 가동 등의 개발로 상징됩니다. 이러한 방식을 유물유적에 일사천리로 적용되어 버리는 그 '무식함'에, 유물유적은 지금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지요... 더구나 정권의 정당성 홍보를 위해 유물유적의 복원이 졸속으로 이뤄졌다는 것에.
석굴암 부속물을 바라다보는 제 마음은 착잡했습니다.

Posted by 밝은 구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