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지(안압지)를 나와 들른 곳은 길 건너에 있는 경주 박물관입니다.
어느덧 맑던 하늘은 구름에 자리를 내어주고 어둑한 구름이 끼이기 시작했어요. 설마 비라도 오려구... 생각했는데, 박물관 경내로 들어서니 후두둑~ 빗물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라구요.
뜻밖의 비에 건물 밖의 사람들은 뛰어다니고. 저는 그냥 비를 맞으며 걸었지요. 우산을 미처 준비 못한게 아쉬웠습니다.

비를 맞고 걸었던 이유는 야외에 있는 불상들을 보기 위해서였어요.
목잘린 불상, 절 건물의 일부분이었을 구조물 조각 들이 전시되어 있더군요. 불교의 쇠락을 직접 보여주는 유물들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서 유학자들에 의한 불교 탄압이 컸었는데, 그 시대의 흔적이 아닌가란 추측을 해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목없는 불상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상반신만 복원된 불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

▲ 과거엔 무엇이었을까요?


본관을 둘러본 후, 박물관 경내에 있는 안압지관으로 들어갔습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이곳에서 전시하고 있어요. 그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주사위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안압지에서 발견된 주사위


놀다가 주사위를 돌려서 벌칙을 실시한 것인데, 위 사진에 적힌 건 三盞一去(삼잔일거), 즉 '술 석잔을 한번에 원샷하기'랍니다. 예전에도 음주문화는 여전했나 보군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안압지에서 출토된 배. 왕도 이 배를 타지 않았을까요?


대개 본관과 안압지관만 둘러본 후 '에밀레종' 앞에서 사진을 찍고 나오는 경우가 흔합니다. 더구나 비도 내리고 있었으니, 건물 안에만 사람이 들어차 있었지요. 사람의 발길이 뜸한 구석에 탑 하나가 외로이 서 있었습니다. 사실 박물관에 들른 것은 이 탑을 보기 위해서였어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내 이름은 '고선사 탑'입니다


다가간 내게, 탑이 말을 건넵니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 난 고선사 탑이라고 해. 아무도 내게 찾아오지 않아서 참 심심했는데 나를 찾아줘서 고마워 ^^'
'고맙긴... 많이 심심했지~? 너보러 이렇게 찾아왔어. 그러고보니 너라고 말하기도 참 그렇다.. 너는 1300살도 넘게 먹었잖니~ ㅎㅎ'
구석에 혼자 앉아 있던 고선사 탑이 쓸쓸해보여서 한동안 비를 맞으며 쳐다보았습니다. 비도 어느새 그치고 구름도 걷혀가더군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탑의 몸돌과 지붕돌.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보여주네요


이 탑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고선사는 과거에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절이예요. 하지만 어느샌가 절도 폐허로 변하고 터만 덩그라니 남게 되었지요. 1970년대에 들어서 이 지역에 덕동댐이 들어서게 되면서 이곳은 그대로 수장되어 버리고(지금의 덕동호) 탑만 이곳 박물관에 모셔진 것이예요. 절에는 탑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절집도 없어지고 터는 물에 잠겨버려, 덩그라니 이 탑만 미아가 되어버린 채 이곳에 머물게 된 것이지요. 그것도 박물관 구석에 쓸쓸하게 말이예요.
그런 이 탑의 처지가 많이 안쓰러워 옆에서 독사진을 찍어주면서 위무해 주었습니다.

사실 이 탑은 우리나라 불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상을 갖고 있는 탑이예요. 죽어 용이 되겠다던 문무왕의 릉, 그 근처에 세워진 감은사의 쌍탑과 더불어 통일신라시기에 세워진 탑입니다. 처음엔 이렇게 덩치가 컸지만, 후일 불국사의 석가탑처럼 날씬하고 작아졌어요. 마치 감은사 탑이 풍성한 몸매의 육체파 배우라면, 석가탑은 균형미를 갖춘 날씬한 몸매의 미인이랄까요.

Posted by 밝은 구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