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점심을 먹고 이제 향할 곳은 멀지 않은 월지와 경주 박물관입니다.
차로 갔었던 예전엔 멀지 않게 느껴지는 길이, 걸어서는 대릉원에서 십여분 이상이 걸리는 거리였어요. 서울의 종각에서 종로 5가만큼의 거리랄까... 반월성이 있는 언덕을 옆으로 끼인 길을 따라 한참동안 말없이 걸었습니다. 차는 많았지만 인적은 드문 거리라 말을 건넬 사람도 없었지만요.

월지에 도착했습니다. '안압지(雁鴨池)'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곳이죠. '안압지'란 폐허가 된 연못에 기러기와 오리(雁鴨)만이 노닐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하지만 '월지'란 이름이 더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 때엔 '반월성'의 동궁이었던 곳이고, 연못을 통해서 달빛도 찾아들었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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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지(안압지)


말하자면 '왕궁의 연못'인 셈인데, 이와 같은 것은 조선의 궁궐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복궁 뒤뜰의 연못과 향원정, 그리고 창덕궁의 후원이 그것입니다. 대개 조선시대의 연못은 궁궐의 뒤뜰에 위치하여 왕실의 사람들이 쉬는 개인적 공간(?)이었음에 반해서, 이때의 연못은 그밖에 연회를 베풀기도 했던 곳인 것 같습니다.(신라왕이 고려왕 왕건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푼 곳이기도 하지요.) 마치 경복궁 향원정과 경회루의 역할이 혼용된 것이랄까요.

신라왕조의 종말 이후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이곳은 1970년대에 발굴복원을 통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1970년대는 유신시대로 국가주의 교육 및 민족적 정체성이 강조되던 시기였지요. 이는 유신체제 합리화와 연결되었고, '국사'는 유신체제 합리화를 위한 주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백제 무녕왕릉과 경주 월지의 발굴, 석굴암의 복원, 단양 적성비의 발견이 있었습니다. 이를 볼 때, 유물유적 발굴 사업이 정치적 의도와 긴밀히 연관된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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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지 전경


월지는 아름다운 연못이었습니다.
넓다란 연못을 한눈으로는 다 볼 수 없게끔 설계해 놓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사진으로 다 담는 일도 어려웠습니다. 위의 파노라마 사진도 월지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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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지를 배경으로 공손한 포즈


지나가는 커플에게 사진을 부탁했습니다. 대신 저도 그 커플을 이쁘게 찍어주었습니다.
사진 찍어주기를 부탁하는 게 아직은 어색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너무 작게 찍힌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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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지에서 셀카. 바람이 참 많이 불었습니다


연못을 곁에 두고 만들어진 길을 조용히 걸었습니다.
한적한 연못가를 따라 몇몇의 연인들이 눈에 보입니다. 데이트 코스로 참 좋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못의 길이 거의 끝나는 지점, 즉 연못이 시작되는 지점엔 이상한 구조물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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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이 유입되는 遺構(유구). 당시 신라인의 솜씨를 엿볼 수 있어요


밖에서부터 물이 들어와 머물다 아래 연못으로 흐르게끔 만들어진 遺構(유구)입니다. 물의 흐름까지도 꼼꼼하게 고민했을 신라인의 공력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월지를 나와 경주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월지 건너편에서 바로 보이는 곳입니다.
경주 박물관은 주로 신라와 관계된 유물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볼 만한 것은 '에밀레종'으로 유명한 '성덕대왕 신종', '고선사지 탑', 그리고 안압지의 유물을 전시한 안압지관과 박물관 바깥에 남겨진 불상 등 유물들인 것 같습니다. 그 밖의 유물들은 집에서 가까운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는 것 같아 그냥 보고 지나갔어요.

Posted by 밝은 구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