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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하루 일상에 치여살다보면, 언뜻언뜻 과거로 돌아갔다 올때가 있다.
과거에 기대어 지금의 나를 바라보면,  문득 예전의 시간들은 아름다운 기억들로 포장되기 시작한다. 돌아갈 수 없는만큼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내겐 머릿 속에서나마 돌아갈 수 있는 과거인 것 같다.

공부를 할 때면, 고3 수험생 시절과 편입학 공부를 하던 시간들을 생각하게 되고 노래를 들으면, 그 노래를 처음 들었던 그 시절의 기억(? 아니, 기억)들이 떠오르곤 한다.
언제부턴가 책을 살 때마다 앞머리에 그냥 떠오르는 구절과 날짜를 적어왔었다. 그랬더니 이제는 책을 무심히 펼칠 때 보이는 글귀와 날짜로 책을 처음 사 보던 그 때를 떠올리게 된다.
일기는 과거를 기억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통로인 것 같다. 십삼년째 써오는 일기 속에 보이는 수많은 글과 그림들. 유치해도 그건 그 당시의 나, 그 자체였다.
역사를 공부해선가, 아니면 시간의 흐름을 잘 끄집어내기 때문일까 연도를 떠올리면 바로 그 때 무엇이 있었는지를 잘 떠올리는 편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84년, LA 올림픽 때 기억이 난다. 길거리에서 놀면서.. 올림픽 때 행진곡인가..? 불러대며 뛰어놀던 시절. 주말은 야구 중계가 있어서 텔레비젼은 아버지 것이 되곤 했다. 어린 마음에 난 재미없는 야구 중계를 보는 게 싫었었는데(야구가 재밌다는걸 알게 된 것은 그 후로부터 훨씬 지난 뒤의 일이었다.)
어느날 삼성이 경기에 나오길래, 서울에 있는 '삼성' 초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어린마음에 '삼성'을 응원해야겠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눈을 흘기셨다. 원래 아버지는 '해태'의 열혈 팬이셨던 거다. 전라도.. 해태.. 김대중.. 이후 평민당.. 난 그게 부모님의 열렬한 지지 대상이 되어야 했는지 그 때는 몰랐다.
언젠가 교과서 맨 앞에 전두환 사진이 있는 걸 보고선, 집에 들어와서 어머니한테 교과서의 대통령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어머니 표정이 어두워지셨다. 그것또한 왜 그랬는지 그 때엔 몰랐다.

87년의 여름은 6월 항쟁이 있었던 시기라지만, 내겐 기억이 잘 남아있지 않다. 가게를 하시면서 바쁘신 부모님의 일천한 사회의식 때문인지, 호남인이란걸 빼면 보수적이신 부모님이 데모 자체를 터부시 해선진 모르겠지만. 그러던 여름 어느날, 금강산 댐에 대한 방송을 봐야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다녔던 학원의 원장선생님도 돈을 모금하러 돌아다니고 금강산 댐이 무너지면 63빌딩의 1/3이 물에 잠긴단 뉴스에서의 친절한 그림 설명과 함께. 이러한 북한의 야욕(?)을 막아내려 코흘리개 어린 아이들 돈을 얼마나 많이 걷어갔는지 모르겠다. 거짓말인 줄 알았을때의 그 황당함이란.
가을, 겨울은.. 한창 대통령 선거가 이슈가 되던 때였다. 어린 마음에 반 아이들끼리 부모님의 지지 후보를 얘기한 적이 있다가 그게 반 친구와 싸움이 되어 얻어맞은 적이 있었다. (당시 그 친구(??)는 농구부로 쌈 짱이었다 ㅡ,ㅜ) 그 친구 부모님은 노태우,  나의 부모님은 김대중.. 싸운 이유를 들으신 선생님께서는 그 친구를 혼내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아마 나를 때려서였다기 보다도 선생님도 정치적 견해를 나름대로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개표 마감 날, 당선방송에서는 이른바 노태우 후보의 '용비어천가'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88년 여름은.. 이상은의 '담다디'와 변진섭의 '새들처럼'이란 노래가 떠오른다. 한창 동네 골목에서 '담다디'춤을 추어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 그 해 여름은 올림픽의 계절. 간간이 떠오르는 기억은, 유도의 김재엽 선수가 한복을 입고 금메달을 걸던 기억과- 여자 핸드볼에서 박빙의 승부로 소련을 물리친 기억. 환호하던 감독과 선수의 모습이 생생하다.

90년 초 앳띤 중학생 입학 시절 부르던 노랜,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 변성기가 되기 전 미성이라 많이 불렀었는데, 변성기가 진행되고선 부를 수 없는 노래가 되어버렸다 ㅜ,ㅠ
학교 C.A. 활동으로 가톨릭동아리 활동을 했었는데, 담당 선생님이 전교조 출신 선생님이었다. 그 때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라는 노래를 부르고선 충격이었던 기억이 난다. 이런 노래가 다 있구나- 민중가요의 존재를, 그리고 전교조라는 존재를 알게 된 게 그때부터였던 듯 싶다.
그 해엔 일본 지바에서의 탁구 세계 선수권 대회가 있었는데. 남북 단일팀으로 참가해서 우승함으로서 환호하던 기억이 난다. 정말 그 때엔 바로 통일된 듯이 기뻤다. 양영자, 현정화 선수.. 그리고 북의 김분희(?) 선수. 이후 한동안 북방정책이라고- 남북간의 유화적인 분위기에 고위급 회담이 이뤄지던 기억이 난다. 그 즈음의 독일의 통일과, 동유럽의 공산화 붕괴는 정말 믿어지지 않았었 사건이었다.

91년 가을엔 점심시간에 문득 나오던 이범학의 '이별 아닌 이별'에 점심 먹다말고 따라 부르던 웃지 못할 기억이 난다. 그 해엔 유독 시위 소식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집이 보라매 공원 근처라, 보라매 공원에서 집회를 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행진을 하던 시위대를 종종 구경할 수 있었다. 길거리에서 종종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눈물 흘리며 집으로 뛰어오기도 하던-. 나중에 알았지만, 공안정국 하에서 많은 대학생 선배가 죽고 다치던 때 가  바로 이때였다. 교육부 장관 때 전교조를 탄압했던 정원식이가 총리가 된다는 소식에 계란 세례를 받았던 것도 이 시기였고. 뉴스에서 이를 보고선, 이러면 안되는데.. 하던 기억이 난다.

92년엔 잊을 수 없는 '서태지와 아이들'. 아이들은 한창 난닝구를 겉에 입고 다니면서 '난 알아요'춤을 춰댔다. 난 아무리 따라해도 안되더라~ ㅎㅎ (지금은 어느정도 처음만 따라함.)
그 해 대통령 선거도 어린 학생들에게는 얘깃거리였다. 부모님의 지지 후보가 내 지지후보가 되고, 그건 교실에서 논쟁, 아니 싸움의 대상이 되곤 했다. 예전의 안좋은 기억 때문인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이른바 '초원복국집 사건'도 기억나고, 정주영이 아파트를 싼값으로 제공하겠다는 공약에도 혹하던 어른들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 해 겨울의 YS의 승리는 내겐 정말 달갑지 않았었다.

93년 고등학생 시절엔 공일오비의 '아주 오래된 연인들'과 '신인류의 사랑'이 유행했더랬다.  어느 가을, 강촌에서 놀러 갔다오는 기차 안에서 처음 들었던 '신 인류의 사랑'이 왜 그렇게 좋던지- 그 이후엔 경춘선만 타면 그 노래가 떠오르곤 했는데...
그 때는 금융실명제니 하나회 숙청이니.. 해서 YS의 개혁이 엄청난 지지를 받을 때였다. 텔레비젼에서는 '판관 포청천'이 유행하고, 그것이 YS와 빗대어지곤 했던 것 같다. 나름대로 대통령이 하는 게 잘 하는 것이라는 마음도 있었고.

94년에는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 룰라의 '백일째 만남'. 주일 학교 여름 캠프 가서 열심히 투투 춤을 따라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그 때 투투랑 룰라의 동영상을 보면 왜이리 유치한지... (아마 그 때 따라하던 우리들은 더 유치했을지 모르지만.)
그 해 아주 덥던 여름 토요일, 김일성 주석 사망 소식을 들었다.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듯 호들갑떨던 분위기도 기억나고.. 카터의 북한 방문 이후, 남북 정상회담을 며칠 남기지 않고 그렇게 저 세상에 간 김일성 주석이 아쉽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죽지 않아 정상회담이이뤄졌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조문을 하자던 이부영 의원에 여론 뭇매질 하던 분위기. 이후 YS는 실망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95년 고3시절 봄엔 룰라의 '날개잃은 천사'로 엉덩이를 무지 많이 때렸었지... 매일 밤까지 야자를 하던 시절,  지나가는 길거리에서 들리던 그 노래가 무지 좋았더랬다. 도서관에서  야자를 하다가 몰래 건너보는 만화책은 또다른 맛~. 그 때 어깨너머 보던 책은 '슬램덩크'였다. 서로 내가 강백호라고 우기면서 덩크를 많이도 시도했었는데.. 전혀 불가 ㅋㅋㅋ 그냥 강백호의 풋내기 슛~으로만 만족해야 했었다.

96년 대학 입학 후 첫 방학... 주일학교 캠프에 교사로 가면서 연습했던 춤은 김건모의 '스피드'. 춤 외우기가 왜 이리 어렵던지, 트위스트를 그 때 지겹도록 추어본 것 같다. 그 해 8월의 '연세대 사태'는 바라보는 내겐 아쉬움이었다. 이유없이 그렇게 끌려내려간 동료 학생들의 모습을 뉴스에서 보며. 같이 동조를 해야겠건만,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 학생들의 분위기는 냉담과 조소 그 자체였었다. 나중에 연세대에서의 8.15통축을 참여하면서 이 때의 부채감을 어느정도 벗어낸 것 같아서 기뻤던 기억이 난다.

97년엔 편입학 공부를 하면서 내 자신이 많이 우울해 했었다. 그 때 힘을 주었던 책이 박노해 시인의 '사람만이 희망이다'란 에세이 집이었다. 그 중, '아직과 이미사이'란 시는 지금도 힘들 때 버팀이 되어주곤 한다. 그 해 겨울 기억에 남는 건, IMF와 DJ 당선-? 경기가 어려울 때라 소설도 그에 편승했음인지 '아버지'란 소설이 베스트셀러였던 기억이 난다.
그 해 11월 어느날, 한양대 노천극장에서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이름의 양심수 석방 콘서트가 열렸다. 박노해 시인이 양심수로서 수감되었던 시절, 시인을 비롯한 여러 양심수 석방을 위한 콘서트였는데. 한양대는 전경들로 통제되고 사람들은 모이는 와중에, 전경들이 최루탄을 터뜨려서 눈물 흘리며 공연을 못보고 결국 집으로 돌아서야만 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 (그 이후에도 한양대는 전경과 또다시 마주치는 안좋은 기억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콘서트조차도 막아버리는 YS정권의 경직성 때문이었을까. 결국 얼마 뒤 YS는 IMF의 주범이 되어버린 채 조용히 청와대를 떠나야만 했다.
그 해의 대선. 예상치 못한 DJ의 당선을 가장 기뻐했던 건 역시 부모님이셨다. 그래, 나도 DJ가 당선되리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으니까.. 내가 보아왔던 선거에서 내가 생각했던 후보가 당선된 건 이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98년 봄에 편입학을 하고 맞이한 5월 축제.. 남학생은 거의 없는 동아리라 내가 심부름을 거의 다 도맡아야만 했다. 물건을 떼러 다니던 가게 앞에서 들려오던 뉴스엔, 인도네시아 독재자 수카르노(?)의 퇴임이 들려오고 있었다. 얼마 안있어 동티모르도 독립을 했고..
가을 군입대를 하고 자대 배치를 받으려 대기하던 기간에  부대에서 마구 흘러나오던 노래는 조성모의 '투 헤븐'이었다. 누군지도 몰랐던 '신인 가수' 조성모는 이후 텔레비전 '출발 드림팀'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던 모습으로 기억에 남았다. 그 때... 군대 막내 시절, 왕 고참의 명령에 작업하다가도 맨날 부르던 노래는 '투 헤븐'이랑 '이등병의 편지'였다.

군대를 제대하던 2000년 겨울에 들었던 노래는 핑클의 'NOW'.. 농구나 축구를 하다가도 음악캠프에서 핑클, SES, 박지윤 등이 떴다 하면.. 얼른 내무실로 달려와 보던 게 당시 군인들 모습이던 기억이 난다.

대학을 졸업하고 머물러 있던 학교.. 한 학생이 붙여준 '타블로 선생님'란 별명에, 난 '타블로'가 무슨 그룹인가 했었다. 알고보니 에픽하이라는 힙합 그룹의 멤버-? 잘 생겨선가(?) 인기도 많던데. 아무튼 그런 별명을 받게 되어서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작년 가을 쯤엔가.. 'Fly'란 노래가 라디오를 타고 들려오길래 한번에 좋아졌었는데. 아마 그 때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기억들, 많이 공감하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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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밝은 구름 :